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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브릿지 연재

제자백가는 이렇게 탄생했다!


제자백가는 이렇게 탄생했다!


제자백가라는 말을 한 번쯤 들어본적이 있을 것입니다. 제자백가(諸子百家)란 중국의 춘추 전국 시대에 활약한 여러 학파 및 여러 학자를 통틀어 이르는 말입니다. 유가, 도가, 묵가, 법가, 명가, 종횡가, 음양가 등이 이에 속해있지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공자와 맹자와 순자는 유가에 해당 됩니다. 마인드브릿지 인문학 강의를 통하여 제자백가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었는데요. 제자백가라고 불리는 자유로운 사사의 꽃이 어떤 배경에서 나왔는지를 사회 경제적 배경과 문화적 배경 두 가지 관점에서 살펴보았습니다. 마인드브릿지 어플 소개<링크>


1. 춘추전국시대
우선 제자백가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자백가에서 제자란 '여러 사상가'라는 의미이며, 백가는 온갖, 아주 많은 학파를 뜻합니다. 사마천의 아버지인 사마담의 저서 '논육가요지'를 통해서 6개 학파로 나눠서 6개 학파에 명칭을 붙이고 사상의 특징과 차별성에 대해서 서술해 제자백가를 정확히 구분해서 구획을 정해놓았습니다. 제자백가는 동아시아의 뿌리깊은 사상중의 하나로 유가, 도가, 묵가, 법가 등을 통틀어 지칭하는 말인데, 춘추적국 시대에 출현하여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상입니다. 춘추전국시대는 엄청난 혼란기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자백가는 혼란한 시기에 사상의 자유가 있었고, 그 때 제자백가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2. 주나라의 통치제도
중앙 권력이 아주 강할 때에는 학문의 자유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글을 잘못쓰거나 말을 잘못했을 경우에는 통제를 받거나 잡혀갈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중앙 권력이 약해졌다면 학문의 자유가 자연스럽게 형성되기 마련입니다. 제자백가 역시 그렇게 형성된 자유 속에 나타난 학문입니다. 제자백가의 탄생 배경을 보면 주나라의 제도 자체의 모순에서부터 시작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나라의 천장이었던 무왕의 동생인 주공의 의해 봉건제의 기틀이 확립되었는데 주나라의 통치제도는 전부 가족관계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중국 전체를 천하라고 한다면 천하를 다스리는 사람을 천자라 하며, 천하에서 떼어받은 나라를 '국(國)' 국을 다스리는 사람을 제후라 하고 제후가 떼어준 나라가 '가(家)', 가를 다스리는 사람들을 대부라 하며 대부의 신하를 가신이라고 칭하고 이습니다. 이러한 통치체계는 모두 혈연 관계였던 것이지요. 이런 통치체제는 초기에는 주나라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지배층간의 촌수는 점점 멀어지고 혈연이 옅어지면서 천자중심의 봉건제는 영향력을 잃어가며 혼란이 발생했습니다. 결국 혈의 관계에서 힘의 원리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제자백가의 또 다른 특징은 생산력(경제)의 변화입니다. 쇠를 농기구로 활용하면서 일손을 많이 덜게 되었고, 소와 비료와 수로의 건설 등으로 더 많은 농작물을 수확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농업 기술의 고도화는 경제의 급속발전을 가져오게 했으면, 농/상/공업의 분업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춘추전국시대에 일어나는 전쟁 역시 점유의 개념이 아니라 소유의 개념으로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영토를 빼앗고, 약한자를 노예삼아 본인 대신에 일을 시키며 편한 생활을 영위하고자 하는 욕구가 생겨서 전쟁이 점점 활발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권력의 변화와 지식의 보편화
전쟁을 통하여 민(民)의 수탈이 가중되면서 백성들은 소극적으로는 도망을 가고 적극적으로는 폭동도 일으키고 했었습니다. 이렇게 도망치고 폭동을 일으켰던 사람들은 당시의 장사꾼들이 전쟁의 자금을 되어 주고 대가로 받은 땅으로 농사를 짓기위해 필요한 인력으로 좀 더 나은 대우를 받으며 보충이 되어지면서 노예와 같았던 백성들의 지위가 상승하게 되었습니다. 한자 역시 상형 문자로 복잡하게 되어 있어 지식의 보편적 보급을 위해서 문자를 간소화하여 지식의 보편화도 가져왔습니다. 전쟁의 일상화는 군대 이동과 보급을 요구하다보니 자연스럽게 교통의 발달을 가져왔고 이로인해서 문화의 신속한 전파가 가능해지기도 했습니다. 주나라 초기는 강력한 군주가 있었기에 책 편찬, 지식의 주도가 모두 국가였으나 왕권의 약화로 제후 중심의 지방 분권화로 지방 문화가 독자적으로 형성되어 사상과 언론의 자유를 가져다 주었다. 이런 배경에서 제자백가가 탄생한 것입니다.

4. 다양한 사상과 학문
제자백가는 사마담의 '논육가요지'라는 책에서 처음 거론이 되었는데, 논육가요지에는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처음으로 각각의 사상에 이름(음양가, 유가, 묵가 등)을 붙였다는 점입니다.
둘째는 처음 5가지 사상에는 좋고 나쁨을 모두 서술하였으나 도덕가에만은 무조건 좋다고만 표현을 했다는 점입니다.

논육가요지 이후에는 제자백가를 다룬 저서가 출판되었으나 이번 강의는 사마담의 논육가요지로 진행되었습니다. 제자백가는 사마담에 의해 총 6개의 사상으로 나눠지는데요.

첫째 음양가는 금지하는 것이 많아서 사람들을 구속하고 두려워하게 만들지만 그들이 순서를 정한 사계절의변화는 뒤썩을 수 없다하며, 세상의 모든 것을 음과 양으로 구분지으려고 했다.
둘째 유가는 학문의 범위는 넓지만 요점을 파악하기 어려움, 애는 썼지만 한 일이 적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한 군신, 부자의 예와 부부, 형제 사이의 차별은 바꿀 수 없다고 했다.
셋째 묵가는 지키기 어려울 정도로 검소와 절약을 강조하였고, 그들이 하는 일을 다 따를 수는 없지만 생산을 중시하고 절약을 강조한 점은 없앨 수 없다고 했다. 묵가는 평생을 극도로 검소하게 살면서 약자들을 돕는 집단이었다.
넷째 법가는 가혹할 정도로 엄격해서 온정은 없었지만, 군신, 위아래의 질서를 잡은 일은 고칠수가 없다고 했다.
다섯째 명가는 사람들을 명칭에 구속시켰기 때문에 전실성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명과 실의 관계를 바로 잡은 점은 주의 깊게 보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도덕가는 정신을 집중시켜 자연에 적을 할 것을 주장하고 만물의 요구를 충족시키라고 하였고, 다른 사상의 장점을 받아들여 시간에 따라 움직이고 사물에 따라 변하며 풍속을 세우고 일을 처리하는 데 마땅하지 않음이 없으며, 요점이 간단하고 시행하기는 쉬워서 힘을 덜 들어도 공이 많다고 했습니다.


이번 강의를 요약하면 춘추 전국시대의 제자백가라는 것이 전부다 정치적인 것에 귀인 한다는 것입니다. 춘추전국시대에는 혼란이 왜 생겼나? 그 혼란을 끝내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 방법을 이론적으로 서술해 놓은 것이 제자백가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런 다양한 사상이 꽃을 피우게 된 이유가 봉건제가 무너지고 혈의 관계에서 힘의 관계로 넘어가면서 그 안에서 지식인들이 자유로워지며 오히려 민간으로 넘어가는 이런 전반적인 이유가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를 만든 배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 강의를 조금이라도 쉽게 이해하려고 몇 번이나 되짚어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자백가 사상에 대해서 좀 더 알고 싶어서 접근한 강의가 이렇게 어려울지 몰랐습니다.^^ 학교를 다닐 때 각각의 사상가들의 이름과 기본 학문 이념 정도는 배웠으나 이를 통칭하는 제자백가의 탄생배경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배웠던 기억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제자 백가의 탄생배경과 특징을 일목요연하게 다시 정리해줌으로서 기존에 알고 있는 내용보다 구체화시킬 수 있는 의미있는 강의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